2009년 11월 13일 금요일

2009년 9월 1일 화요일

탈근대주의(Postmodernism)와 교회, 그리고 평화

얼마전 대학청년부 금요모임을 2주간 인도할 기회가 있었다.
무엇을 이야기할까 고민하던 중 postmodernism을 다뤄보자는 이야기들이 있어서 가이드로 사용하기 위해 써본 글이다. '평화'라는 그리스도의 가치와 굉장히 동떨어져있는 현대 교회를 보며, 다시금 '교회'와 '평화'가 연합할수 있는 길을 postmodernism에서 모색해 보고, postmodernism을 바라보는 건강한 기독교적 시각을 고민해 보았다.

탈근대주의(Postmodernism)와 교회, 그리고 평화

Postmodernism. 그 어떤 종교, 철학, 이념, 예술도 한가지 기준으로만 평가받지 않고, 우등과 열등이 명확히 나뉘지 않는 시대이다. 여기서 모두는 “제 기능이 따로 있다”라는 평등적 사상아래, 모든것이 계급적이 아닌 기능적으로 분류되고 각자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된다. 이 현상은 종교적 “다원주의”와 기본적인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수 있다. 한가지 기준으로 무엇인가를 평가하고 재단하던 우리의 modernism적 습성은 이러한 postmodernism이 우리의 일상에 침투함에 큰 거부감을 보이게 된다. 이로인해 하나님이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많은 신, 혹은 상품 중 하나가 되어버린 이 postmodern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불안하다. 다원주의적 현상을 신앙의 위협으로 느끼고 교회는 세상을 향해 벽을 쌓기 시작했고 (보수)기독교에서 즉각적으로 취한 입장은 postmodernism를 공격하고 폄하하는 것이였다.
하지만 정말 진리를 살아가고 있다는 그리스도인 이라면 이렇게 불안해 하며 postmodernism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김기대 목사(LA 평화의 교회)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신학과 교회가 결코 수세에 몰릴 이유가 없다"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탈중심, 탈논리, 탈이성을 추구하는 불안한 시대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동시에 전 시대를 껴안으려는 건강한 시대라고 볼 수 있다. 해석과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다시 부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시대"라고 이야기 한다. 과학이 세계의 흐름을 주도해오던 modernism의 역사속에 사실 교회와 하나님은 그 위치를 많이 상실해 왔다. 모든것에 논리적이며 과학적인 “한가지의” 설명과 해석만을 받아들여 오던 그 시대속에 교회는 점차 영향력이 없어진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postmodernism의 “전 시대를 껴안으려는” 속성은 다시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릴수 있는 기회를 가져온 것이라 할수 있다.

Postmodernism의 중요한 축은 바로 차이의 인정이고 평등이다. 이 곳에서는 강압적 권위주의와 폭력은 절대로 자리할수 없다. 이것은 Postmodernism이 교회로 하여금 예수의 가치인 “평화”를 회복할수 있도록 큰 가르침을 줄수 있는 부분이고 교회는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할 필요가 있다. 교회(기독교)는 지난 역사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 지난 역사속에 기독교는 진리를 지킨다는 명목하래 권력과 야합하여 힘의 통치를 추구하며 폭력적 행실을 보여왔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 윤리 및 가치들을 힘의 지배를 통해 타인들에게 강압적으로 요구해 왔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에도 여러 교회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예: 한기총의 ‘다빈치코드’ 반대 시위) 이렇게 동일성만 주장하고 ‘차이’를 부정하여 대립과 죽음 안타까운 역사가 무성하게 자라온게 기독교 역사의 큰 부분이였고 그것은 ‘진리’사수를 위해 예수의 평화와 사랑이라는 진정한 의미의 ‘진리’를 무너트려온 모순의 역사였다. 이제 교회는 서로의 ‘다름’을 긍정하면서 우리가 이전에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를, 그리고 더 나아가 새롭고 건강한 영성을 발견할수 있어야 할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것은 “인간의 속성은 일점으로 축소하기에 다양한 내면세계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한 개인 안에도 다양성이 존재하고 사람들의 관계속에선 더 많은 다양성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이 ‘다름’과 ‘차이’를 하나의 개념과 질서와 해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은 분명한 독선이며 오만이다. 차이를 긍정하는 것은 자신이 틀릴수도 있다고 하는 당연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임과 동시에 상대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약자들과 소수자들의 목소리에도 귀기울일수 있도록 해준다. 다양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다양한 대답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가지 답만을 제시하는건 오히려 왜곡의 소지가 많으며 위험한 접근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9-10)
Postmodernism의 이렇한 긍정적인 측면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더욱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로 살아가는데 도움을 줄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중요한건 이말의 뜻이 절대로 예수를 기초로하는 기독신앙이 ‘진리’가 아닐수도 있다고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 ‘진리’를 믿고 지키고 살아가며 전하는 그 방법론에 있어서 평화적이여야 하고 그 평화살기를 해낼수 있는 능력과 방법을 postmodernism의 가치속에서 찾아 볼수 있다는 이야기다. 서로의 다름과 다양성을 존중하고 그것을 힘으로가 아닌 평화적 대화와 삶으로 풀어나가고자 하는 그 가치는 예수의 가치이기도 하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된자라 하셨으며 의을 위하여 박해를 ‘하는’자가 아니라 박해를 ‘받은’사람이 복된자라 하셨다. 이 말은 서로를 존중하줄 알며 소수자들과 약자들의 편에서는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야기와 같은 뜻일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원수’ 또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우리가 경청해야 하는 타인의 목소리에는 ‘원수’도 당연히 포함된다. ‘타인’이라는 말은 절대로 나와 같은 뜻을 공유하는 친구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한 기본적인 깨달음이 우리안에 있다면 그 어떤 사람들도 소중히 대할수 있고 그 어떤 목소리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질수 있을것이다. 이젠 기독교가, 교회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더 평화적일 필요가 있고 ‘아름다운’ 삶을 세상에 보여줄 필요가 있다. ‘진리사수’의 목적으로 자행된 수많은 크고 작은 폭력과 힘의 지배의 고리를 잘라내고, 그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사랑과 평화의 삶이라고 하는 예수의 ‘아름다운’가치로 되돌아가야 갈 시점이다.

2009년 8월 31일 월요일

일본의 정권교체

일본.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54년만에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의미있는 일이라고 본다. 앞으로 일본과 아시아가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두고 볼 일이다.
한국처럼 신자유주의의 늪에 빠져 10년 안에 몰락한 뒤 보수정권을 다시 불러오는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2009년 7월 26일 일요일

'보수', 욕망의 또 다른 이름

제목이 너무 볼온한가? 어쨌든.
'보수'란 무엇인가? 우선 위키백과 부터 찾아보자.

"보수주의(保守主義, conservatism)는 종교나 문화 및 민족의 기존 가치관 유지를 주장하는 정치 이념이다.

종교나 문화 및 민족의 기존 가치관 유지라... 뭔가 숭고하게 들린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보수'가 그만큼 숭고한가? 우리의 사회는 철저히 여러 계급으로 나뉘어진다. 계급이 나뉘는걸 탈피해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이렇게 계급이 나뉘어 사는 우리의 사회에서, 당연히 힘있는 상류계급의 이념과 사상이 더 실현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 상류계급은 본인들이 꼭대기에 올라 앉아 있는 그 현실을 '현상유지' 하고 싶어 하고, '보수주의'를 선택하게 된다. 자기만 배불르기 위한 현상유지. 이것이 오늘날의 '보수'다. 소중한 가치를 지켜내기 위한 보수라기 보다는, 자기의 위치와 부와 명예를 지키기 위한 보수. 누구 말대로 '이념'보수는 사라지고 모든 보수는 '생계형' 보수가 되어있다. 쉽게 말해, 남이야 어떻게 됐는 최대한 나만 잘먹고 잘살자고 하는 사상. 그것이 우리시대의 보수 이고, 난 이런 보수주의를 그냥 '욕망'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누군가는 정말 차고도 넘치고 넘쳐서 주체할수 없을 만큼 가지고 있는 이 현실 속엔 당연히 그와 반대인 사람들, 오늘 내일 먹을것 조차 없어 인간적 품위는 오래전에 손에서 놓아 버릴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도 존재 한다. (너무 당연한 이치라 말하기도 민망하다.) 이러한 현실속에 자기만 배부르기 위해 '보수주의자'라는 가면을 쓰고 (공공 의료 보험에 괴상한 정치적 언어만 쓰면서 반대하고, 전쟁 찬양하며, 자기의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했던 노동자를 쓰고 버리는 물건 취급하며) 다니는 사람들의 맨얼굴은 그저 욕망덩어리일 뿐이다.

몇가지 더 하고 싶은 이야기 (CLICK HERE)



"초딩도 이해하는 예수의 경제학"



하지만 성인들은 (특히 교회 좀 다닌 다고 하는 사람들 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예수의 경제학.
(사실은 이해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라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하겠다.)

*이미지 출저: gyuhang.net (일러스트 김대중)

2009년 7월 25일 토요일

4학년 4반 윤영식

오늘 문득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셨던 이오순 선생님이 떠올랐다. 조금 쌩뚱맞은 이유에서 이기도 하다. 칼빈주의 신학과 애나뱁티스트의 신학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을 하다, 문득 어릴적 읽은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 10인" 이라는 책에서 칼빈에 대해 읽었던 것이 떠올랐고, 그 책을 당시 초등학교 4학년 아이였던 나에게 선물해 주신 이오순 선생님이 문득 떠올랐다. 어쨌든 중요한건 이 생각의 흐름이 이오순 선생님을 떠오르게 했고 그 때의 좋은 기억들이 떠올라 잠시 미소을 지었다는 것이다. 생각을 해보면 초중고를 다니면서 인격적 결함이 있는 선생님을 만나 본 기억이 없는듯 하다. 특히 조국에서의 보냈던 중학교 1학년 때 까지 만났던 선생님들은 모두 학생들을 "인격체"로 대해 주셨던 고마운 분들 이셨다. 대한민국에서 보편적으로 모두가 쉽게 할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그 선생님들 중 유난히도 이오순 선생님이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그는 카톨릭 신자였다. "개신교" 교회를 열심히 출석하며 주일학교를 드나들던 나에게 자연스레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고, 무언가를 강요하시기 보다는, 초등학교 4학년이였던 나의 생각에 대해 듣고 싶어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남아 교실을 청소를 해야하는 당번일 때도 함께 남아 청소하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아마 저 책을 선물 받은것도 그 청소 도중 이였던것 같은데 이것은 확실하진 않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떤 마음으로 도대체 아직 제 몸 하나 소중히 다루기 힘든 나이인 초딩4학년에게 저런 책을 선물해 주셨을지 좀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ㅋㅎㅎ) 초등학교 4학년이라 자세히 생각나지는 않고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도 많이 없지만, 그냥 따뜻한 그의 모습이 오늘 문득문득 떠올랐다. 만약에 지금 찾아뵐수 있다면 함께 교실에 앉아 사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신앙과 삶, 예수의 길 따르기 등등에 대해 함께 커피를 홀짝이며 이야기 할수 있을까? 지금은 그냥 꿈만 같은 이야기다. 내 기억으로 선생님이 40년대생이시라고 알고 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올해 정확히 65세 이실거다. 언제나 찾아뵐날이 올수 있을까? 건강하셔야 될텐데...

2009년 7월 19일 일요일

욕망의 끝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 (이사야 5:8)

엄중한 경고. 시스템화된 맘몬의 체제안에 사는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말씀.

2009년 7월 8일 수요일

평등은 이 시대의 일반상식

발터벤야민이 이미 한세기 전에 예고 했던 "필자권력 붕괴"의 시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우리안에 깊이 스며들어 하나의 자연스런 일상이 된 지금, 인터넷 안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한 글놀이를 하고 있다. 당연히 잘쓰는 사람이 더 주목을 받고, 못쓰는 사람은 관심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중요한건, 현실의 "나"가 누구이건, 소득과 학벌과 직장과 사는곳과 계급에 상관 없이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서 출발할수 있게 되는 구조가 형성이 되었다. 대중은 더이상 특정한 이념으로 무장한 하나의 필자권력에 그대로 순응하지 않는다. 쌍방향성을 띄지 못한 일방적인 원웨이 커뮤니케이션은 더 이상 대중에게 매력적이지 못한 모습이다. (인터넷 글쓰기와 벤야민의 미디어 이론에 대해선 아래 동영상에서 더 자세히, 더 명확히 들을수있다. 진중권님의 설명이다.)


이러한 "평등 현상"은 인터넷 글쓰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상담을 하며, 사람들을 대하며 느끼는건,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권위주의적인 인간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인간으로서의 세련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말 그대로 입만 살고 귀는 죽어 인간의 생물학적 기능을 온전히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할수 있겠다. (적어도 내 주위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는듯 하다.)

영화 '똥파리' 중간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밖에서는 병신 같은 게 집에서는 김일성 같이 굴라 그래.” 집에서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는 한 남편에게 주인공인 상훈이 내뱃는 말이다. 이 장면에서 나의 오른쪽 뇌는 절박한 삶의 자리에서 억눌려 그렇게 밖에 자신을 내세울수 없는 우리내 '아버지'들과 함께 울고 있었지만, 나의 왼쪽 뇌는 비상식적인 귄위를 휘두르는 가부장적인 (일부 혹은 대다수) 한국 남자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대사에 통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쨌든 일방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모습은 비상식적이며 비합리적인 모습이라는것은 이제 영장류에겐 일반상식이 된듯 하다.

윗분들은 짜증나겠지만, 제발 이런 진보적 현상을 과거로 되돌리지 말자.
이제서야 겨우 하나있는 입과 열개 있는 작은 손가락들을 통해 자기의 목소리를 낼수 있게된 많은 사람들의 권리를, 그 즐거움을 다시 낼름 빼앗아가 버리지 말자는 거다. 여러가지 목소리를 접함으로 인해 '나'라고 하는 작은 울타리가 허물어지고 관점이 넓어지는 경험을 모두 해보았을게다. 하지만 권력이라는걸 가지게 되면 이 좋은 경험을 할수 있는 기회가 줄어드는 모양이다. 조금은 짜증나는 현실이다.

윤세은 졸업


윤세은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사진에서 윤세은을 찾는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

2009년 7월 1일 수요일

영화 "똥파리"


보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아픈 영화.
삶의 끝자락으로 내몰린 채 살고 있는 이들.
가난에 눌리고, 삶의 무게에 눌려 그 분노와 억울함이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표출된다.
자연스레 가족은 화목을 잃어버리고 서로 얼굴을 마주 하는것 조차 고통의 시간이 되버리고 만다.
마음속에 쌓여오던 분노는 서로에게 씻을수 없는 육신과 정신의 상처를 입힌다.

주머니가 가난해지면 정신이 가난해져 버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사회 구조...
이 마몬중심 구조 속에서 가난이라는 천막 밑에 사는 이들은 사나워지고, 가족은 허물어지고, 상처 많고 더 사나운 다음 세대가 이어지고, 더욱 깊은 나락으로 추락하고...

이 영화는 그들과 함께 울어주고 있지만 정작 그들은 "영화관람"자체가 사치인 삶...
슬픈 현실이며 어떻게든 변화되어야 될 현실이다.

영화 전체에 걸쳐 쉬지 않고 나오는 욕설이 주는 불편함은, 일반인들이 삶의 끝자락에서 사는 이들에게서 느끼는 불편함을 상징하는것 같아 더욱 마음이 아프다.

이 영화 꼭 보시라.

<예고편>






2009년 6월 30일 화요일

"예수전" 강독 모임 참석

LA 평화의교회에서 있었던 "예수전" 강독 모임에 처음으로 참석하였다.
몇달전 뉴스앤조이 박지호 기자님께 참석 권유를 받은 뒤 계속 참석하려 하였으나
시간의 엇갈림으로 인해 어제 드디어 참석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출석한것이라 역시 선천적인 내성적임(?)으로 인해 거의 아무말도 하시 않고 듣기만 하다 오긴 했지만 여러 모로 흥미있는 모임인듯 하다.

최근들어 부쩍 김규항씨에 대한 나의 관심이 늘어난것도 이 책의 공이 크다.
여러모로 토론되어져야 부분이 많은 책이기도 하고 마음속 깊이 침투되어 존재를 흔들어 놓는 깨달음의 책이기도 하다. 김규항, 예수전, 강독모임... 그 모두가 흥미로움의 연속이다.


2009년 6월 27일 토요일

청파감리교회


한국교회들 중에 제가 제일 큰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청파감리교회" 영상입니다.
평화를 사랑하고, 환경을 귀하게 여기며, 언제 어디서나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됨을 지향하는 교회.
이 아름다운 비젼을 교인들과 함께 힘써 나누시는 김기석 목사님.

이런 교회가 진정 기독교의 희망이며, 사회의 희망이며,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희망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곳 이민 사회에도 이런 교회가 세워지길 소망해 봅니다.

(*영상을 보다보니 김기석 목사님 인터뷰에 성함이 김기철 목사님으로 오타가 나 있네요.)

누가 사람인가?

어젯밤 2시간 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한 탓에 반수면 상태에서 김규항님의 블로그를 읽다가 교육에 대한 글귀 하나를 보고 잠이 번쩍 깼다.

"오늘 한국이 절체절명의 사회인 건 물론 모든 사람이 말하듯 경제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이 사회가 아이들을 '나쁜 인간'으로 길러내는 일에 이념과 계급을 불문하고 온힘을 모으고 있다는 데 있다. 한국은 아이들을 이기적이고 경쟁적이며, 물질적 풍요를 인생의 목표로 삼으며, 소박함의 아름다움과 정신적 충만을 우습게 여기는 인간으로 키우는 걸 교육이라 믿는 사회이며, 어떻게 하면 그런 교육을 더 효율화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걸 교육문제라 말하는 사회다." (김규항)

동감한다. "사람"의 정의(definition)와 "상품"의 정의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누가 좋은 상품인가가 아닌 "누가 사람인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되는게 교육이리라.

2009년 6월 24일 수요일

자주가는 블로그

요즘들어 가주 가는 블로그...

gyuhang.net - 김규항님의 블로그
- "B급 좌파"란 호칭으로 더 잘 알려져있는 김규항님. 최근 그의 저서 "예수전"을 읽고 그의 글과 사상과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예수를 통해 우리 사회에 대안현실을 찾는 김규항. 듣기로 그는 건강한 어린이 읽을거리를 만들기 위해 어린이 잡지도 발행한다고 한다. 흥미로운 사람이다.

basil83.egloos.com - 노정태님의 블로그
- "포린폴리스 한국어판" 편집장 노정태님. 치밀한 논리전개와 혁명적 사고가 눈에 띄는 젊은 글쟁이다. (나보다 2-3살 정도 위인걸로 알고 있다.) 노정태님의 글을 읽으면 그의 혁명적 마인드와 그걸 풀어내는 글, 그리고 그걸 살아내는 적극성, 그 모든면에서 도전이 된다.

2009년 6월 23일 화요일

lacma


교회 목장 친구들과 함께 LACMA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에 다녀 왔습니다.
탈근대 시대의 문화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다고 하고 싶지만, 그건 좀 오바지요. 그냥 목장 친구들과 함께 예술을 감상하고 문화생활을 하고 왔습니다. 하지만 시작은 닭갈비 였고 끝은 팥빙수와 다방커피 였음.

2009년 6월 19일 금요일

하나님 나라: 복제시대에 감춰진 원본

   문화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기에 일종의 시대의 철학이라고 말할수도 있을것이다. 발터벤야민의 말로는 현대의 시대는 기술복제의 시대다. 모든것들이 기술로 인해 빠르게 복제되고 전달되며 그 복제가 또 복제가되어 퍼져나간다. 그 복제들은 더 이상 원본과의 일치와는 관계없이 서로서로 관계하며 움직인다. 그리고 그 관계들은 어떤 특정한 위계질서로 정리되지 않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미셸 푸코, 『파이프』, p. 72). 그것들은 어떠한 방향으로도 관계를 형성할수 있다. 여기에는 굉장히 많은 긍정적 층면들이 있다. 예를들면, 계급의 붕괴와 평등이 그것이겠다. 그 어떤 철학도, 이념도, 예술도, 음악도 한가지 기준으로만 평가받지 않고, 우등과 열등이 명확히 나뉘지 않는다. 여기서 모두는 “제 기능이 따로 있다”라는 평등적 이념아래, 모든것이 계급적이 아닌 기능적으로 분류되며 서로 각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이러다 보니 표현의 자유가 넓어지고, 무언가를 전하는 기능을 하는 media조차도 그 자체로 메세지가 되어 자기의 목소리를 내게된다. 함께 어우러져서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야하는 사명이 있는 인류에겐 한층 진보된 의식이라 하겠다.
    
   하지만 또한 부정적인 측면도 엄연히 존재한다. 모든것이 복제되고 또 그것이 복제되는 동안 원본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벤야민은 이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음에도 원본이 없어지는 이 현상을 “아우라의 붕괴”로 표현하였다. 사진으로 찍어 놓은 고흐의 작품을 보는것과 실제 고흐의 작품을 보는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 실제 작품 앞에서는 말로 표현할수 없는 아름다움, 존재의 떨림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 작품을 사진으로만 봐야할때는 더 이상 그만큼의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원본이 사라진 세상, 본질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존재의 떨림, 그 아우라를 경험하기란 쉽지 않는일이다. 혹은 불가능한 일일수도 있을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수많은 정보와 복제 이미지의 홍수속에 본질의 이미지를 기억하지 못해 방황하게 된다. 그 현상속에 우리는 결국 "
세계가 무엇인지, 인간은 무엇인지, 전체적 견해를 형성할 능력을 잃어" 버리게 된다. 진중권 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세계관의 공백"이라고 이야기 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과거처럼 역사의 최종목적(텔로스)을 설정하는 그런 세계관 철학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상황입니다. 과거와는 다른 방식과 형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형성시켜주는 새로운 지식의 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계관의 공백 中>
그 세계를 바라보는 "다른 방식과 형식"을 "예수"의 존재와 그의 삶, 그의 가르침에서 찾아볼수 있지 않은까. 여기서는 "다른" 방식이라고 표현 되었지만, 예수의 방식, "하나님 나라"의 모습, 그것이 결국 원본이다. 우리가 겪고있는 "세계관의 공백"을 덮어씌울 "하나님 나라"라는 그 이미지, 그것이 원본이며 진정한 현실이리라.
   모든것이 제 목소리를 내고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정의를 위해 노력하지만 아직 그 평화는 당도하지 않았다. 모두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이상을 가지고 살지만 궁극적 이상의 원본이 사라진 이때에 모두가 어지럽기만 하다. 이런 카오스 속에 살고 있는 인류에게 예수는 진짜 현실, 즉 원본이 무엇인지 그림으로 그려주고 있다. 하나님 나라, 그 진짜 현실, 그 "원본"을 우리 마음속에, 그리고 우리의 의식속에 이미지화 시켜놓고 계신다
.

그 원본이 어떠한 이미지를 띄고 있는지,
도대체 어떤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지,
그 그림을 그려보는 작업을 슬슬 시작해보려 한다...

2009년 6월 18일 목요일

Pi - Travel to Faith


Travel to Faith
작사/작곡: 김종민

믿음을 쫓아 시간을 넘어 이렇게 힘들게 찾아왔는데 그는 아직아니라고

안일한 생활 속에 편안한 반복된 지겨움에 살이찌고 무뎌가는 생각들


내가 나를 알아감에 그는 그를 보여주네

서로의 모습속 거울되어 잃어버린 나의 조각 그가 이뤄주네


길고 긴 여정 그가 함께가네 결코 외롭지않은 너와 나의 이야기
가벼운 짐을메고 너와나 손을잡고 출발해보네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 내 어깨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며 너는 행복하다고

달리는 기차안 흔들리는 풍경속에 아직은 알수 없는 종점까지 곤한잠을 청해보네


내가 나를 알아감에 그는 그를 보여주네

서로의 모습속 거울되어 잃어버린 나의 조각 그가 이뤄주네


길고 긴 여정 그가 함께가네 결코 외롭지않은 너와 나의 이야기
가벼운 짐을메고 너와나 손을잡고 출발해보네

길고 긴 여정 그가 함께가네 결코 외롭지않은 너와 나의 이야기
가벼운 짐을메고 너와나 손을잡고 주바라보네





우리 밴드 Pi가 얼마전 선보였던 곡 Travel to Faith...

오늘날의 바리세인

오늘날의 바리세인, 그들은 누구인가?
이 질문에 답해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예수가 바리세인들을 엄히 꾸짖으시던 그 시절, 바리세인들은 사실 별로 비난 받을만한 꺼리가 없는 사람들로 여겼졌었던 것으로 볼때, 아마 오늘날의 바리세인들도 자신들이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굳게 믿으며 살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의 바리세인들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주제넘게 2000년전 바리세인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타국의 침략으로 부터 민족을 지키기 위해 율법을 앞세우고 지키며 제 자신을 분리시켰던 바리세인들. 그로인해 영향력도 있고 존경심도 마음껏 얻으며 살았을 양심적인 지식인들. 하지만 그로인해 자신들이 아닌 다른 모든 이들을 죄인으로, 인간 답지 않은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 그들. 이렇게 타인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하기 위해, 모두가 존엄한 인간으로 살게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이 땅에 임하게 되는걸 은연중 거부하고 있었던 그들. 그 모습을 보며, 오늘날의 바리세인은 어쩌면, 바로 "나"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다. 바로 나, 그리고 우리. 어느정도의 사회의식을 지닌, 깨끗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기독교인. 이런 나의 모습에서 바리세인의 모습이 투영된다.

변화되야 할것이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 아니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노무현,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

  우리는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다들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상당히 큰 충격이였습니다. 집권중 추진 하였던 한미 FTA등 여러가지 불안한 경제정책들 때문에 그분을 적극지지 하지는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인간적인 매력과  그가 힘써 이룩하여 놓은 민주주의의 확립, 권위주의의 탈피는 높게 평가 받아야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학벌, 재벌, 부유함이 짖누르고 있는 이 사회에 작은 틈을 내려 힘썼던 그의 노력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에 구애받지 않는 평등적 커뮤니케이션을 추구하는 분이셨구요.

    저마다 평가는 다르겠지만, “사람사는 세상”을 꾸준히 외치셨던 분이였던게 기억에 깊게 남아있습니다. 대통령직에 있는 5년 동안 그 이상적인 꿈이 많이 변질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이제는 우리 세대가 짚어져야할 역사적 과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지난 세대들이 나름대로 씨름 하여왔던 숙제 였고 정말 많은 시행착오와 좌절들이 있어왔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사람사는 세상”이라는 목표를 놓고 본인의 역할을 충분히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더욱더 타협하지 않는 모습으로 이 목표로의 행진에 참여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죽음은 없어야 할것입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이 사회 때문에 사람다움을 추구 했던 사람은 이런 비참한 끝을 맞아야 하는 비극은 더 이상 되풀이 되지 않아야할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라 생각됩니다. 타인을 본인과 다름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가치는 우리 인류의 보편적 가치입니다. 나를 마주보고 서있는 사람도, 나와 같은 곳을 보고 있는 사람도, 나도, 다 같은 인격체임을 깨달아 알수 있는 나이의 사람들이라면, 저 보편적 가치를 잊지 말고 살아야 겠습니다. 최소한의 생명권을 위해 목매인 소리를 외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때아닌 경제불황 때문에 매순간 발을 동동구르고 있는 실업자들, 낙후한 공공시스템 때문에 거동의 자유가 제한되어 좌절하고 있는 장애인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여성들, 터문이 없이 비싼 학비 때문에 20대때부터 큰 빚더미에 앉아있는 청년들... 그 모두가 함께 웃고 사람답게 살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우리의 시선을 점점 더 사회의 그늘진 가장자리로 돌려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