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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자유의 아름다운 표현
윤바울의 블로그
2009년 11월 13일 금요일
2009년 9월 1일 화요일
탈근대주의(Postmodernism)와 교회, 그리고 평화
얼마전 대학청년부 금요모임을 2주간 인도할 기회가 있었다.
무엇을 이야기할까 고민하던 중 postmodernism을 다뤄보자는 이야기들이 있어서 가이드로 사용하기 위해 써본 글이다. '평화'라는 그리스도의 가치와 굉장히 동떨어져있는 현대 교회를 보며, 다시금 '교회'와 '평화'가 연합할수 있는 길을 postmodernism에서 모색해 보고, postmodernism을 바라보는 건강한 기독교적 시각을 고민해 보았다.
탈근대주의(Postmodernism)와 교회, 그리고 평화
Postmodernism. 그 어떤 종교, 철학, 이념, 예술도 한가지 기준으로만 평가받지 않고, 우등과 열등이 명확히 나뉘지 않는 시대이다. 여기서 모두는 “제 기능이 따로 있다”라는 평등적 사상아래, 모든것이 계급적이 아닌 기능적으로 분류되고 각자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된다. 이 현상은 종교적 “다원주의”와 기본적인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수 있다. 한가지 기준으로 무엇인가를 평가하고 재단하던 우리의 modernism적 습성은 이러한 postmodernism이 우리의 일상에 침투함에 큰 거부감을 보이게 된다. 이로인해 하나님이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많은 신, 혹은 상품 중 하나가 되어버린 이 postmodern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불안하다. 다원주의적 현상을 신앙의 위협으로 느끼고 교회는 세상을 향해 벽을 쌓기 시작했고 (보수)기독교에서 즉각적으로 취한 입장은 postmodernism를 공격하고 폄하하는 것이였다.
하지만 정말 진리를 살아가고 있다는 그리스도인 이라면 이렇게 불안해 하며 postmodernism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김기대 목사(LA 평화의 교회)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신학과 교회가 결코 수세에 몰릴 이유가 없다"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탈중심, 탈논리, 탈이성을 추구하는 불안한 시대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동시에 전 시대를 껴안으려는 건강한 시대라고 볼 수 있다. 해석과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다시 부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시대"라고 이야기 한다. 과학이 세계의 흐름을 주도해오던 modernism의 역사속에 사실 교회와 하나님은 그 위치를 많이 상실해 왔다. 모든것에 논리적이며 과학적인 “한가지의” 설명과 해석만을 받아들여 오던 그 시대속에 교회는 점차 영향력이 없어진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postmodernism의 “전 시대를 껴안으려는” 속성은 다시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릴수 있는 기회를 가져온 것이라 할수 있다.
Postmodernism의 중요한 축은 바로 차이의 인정이고 평등이다. 이 곳에서는 강압적 권위주의와 폭력은 절대로 자리할수 없다. 이것은 Postmodernism이 교회로 하여금 예수의 가치인 “평화”를 회복할수 있도록 큰 가르침을 줄수 있는 부분이고 교회는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할 필요가 있다. 교회(기독교)는 지난 역사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 지난 역사속에 기독교는 진리를 지킨다는 명목하래 권력과 야합하여 힘의 통치를 추구하며 폭력적 행실을 보여왔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 윤리 및 가치들을 힘의 지배를 통해 타인들에게 강압적으로 요구해 왔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에도 여러 교회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예: 한기총의 ‘다빈치코드’ 반대 시위) 이렇게 동일성만 주장하고 ‘차이’를 부정하여 대립과 죽음 안타까운 역사가 무성하게 자라온게 기독교 역사의 큰 부분이였고 그것은 ‘진리’사수를 위해 예수의 평화와 사랑이라는 진정한 의미의 ‘진리’를 무너트려온 모순의 역사였다. 이제 교회는 서로의 ‘다름’을 긍정하면서 우리가 이전에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를, 그리고 더 나아가 새롭고 건강한 영성을 발견할수 있어야 할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것은 “인간의 속성은 일점으로 축소하기에 다양한 내면세계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한 개인 안에도 다양성이 존재하고 사람들의 관계속에선 더 많은 다양성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이 ‘다름’과 ‘차이’를 하나의 개념과 질서와 해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은 분명한 독선이며 오만이다. 차이를 긍정하는 것은 자신이 틀릴수도 있다고 하는 당연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임과 동시에 상대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약자들과 소수자들의 목소리에도 귀기울일수 있도록 해준다. 다양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다양한 대답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가지 답만을 제시하는건 오히려 왜곡의 소지가 많으며 위험한 접근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9-10)
Postmodernism의 이렇한 긍정적인 측면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더욱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로 살아가는데 도움을 줄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중요한건 이말의 뜻이 절대로 예수를 기초로하는 기독신앙이 ‘진리’가 아닐수도 있다고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 ‘진리’를 믿고 지키고 살아가며 전하는 그 방법론에 있어서 평화적이여야 하고 그 평화살기를 해낼수 있는 능력과 방법을 postmodernism의 가치속에서 찾아 볼수 있다는 이야기다. 서로의 다름과 다양성을 존중하고 그것을 힘으로가 아닌 평화적 대화와 삶으로 풀어나가고자 하는 그 가치는 예수의 가치이기도 하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된자라 하셨으며 의을 위하여 박해를 ‘하는’자가 아니라 박해를 ‘받은’사람이 복된자라 하셨다. 이 말은 서로를 존중하줄 알며 소수자들과 약자들의 편에서는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야기와 같은 뜻일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원수’ 또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우리가 경청해야 하는 타인의 목소리에는 ‘원수’도 당연히 포함된다. ‘타인’이라는 말은 절대로 나와 같은 뜻을 공유하는 친구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한 기본적인 깨달음이 우리안에 있다면 그 어떤 사람들도 소중히 대할수 있고 그 어떤 목소리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질수 있을것이다. 이젠 기독교가, 교회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더 평화적일 필요가 있고 ‘아름다운’ 삶을 세상에 보여줄 필요가 있다. ‘진리사수’의 목적으로 자행된 수많은 크고 작은 폭력과 힘의 지배의 고리를 잘라내고, 그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사랑과 평화의 삶이라고 하는 예수의 ‘아름다운’가치로 되돌아가야 갈 시점이다.
무엇을 이야기할까 고민하던 중 postmodernism을 다뤄보자는 이야기들이 있어서 가이드로 사용하기 위해 써본 글이다. '평화'라는 그리스도의 가치와 굉장히 동떨어져있는 현대 교회를 보며, 다시금 '교회'와 '평화'가 연합할수 있는 길을 postmodernism에서 모색해 보고, postmodernism을 바라보는 건강한 기독교적 시각을 고민해 보았다.
탈근대주의(Postmodernism)와 교회, 그리고 평화
Postmodernism. 그 어떤 종교, 철학, 이념, 예술도 한가지 기준으로만 평가받지 않고, 우등과 열등이 명확히 나뉘지 않는 시대이다. 여기서 모두는 “제 기능이 따로 있다”라는 평등적 사상아래, 모든것이 계급적이 아닌 기능적으로 분류되고 각자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된다. 이 현상은 종교적 “다원주의”와 기본적인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수 있다. 한가지 기준으로 무엇인가를 평가하고 재단하던 우리의 modernism적 습성은 이러한 postmodernism이 우리의 일상에 침투함에 큰 거부감을 보이게 된다. 이로인해 하나님이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많은 신, 혹은 상품 중 하나가 되어버린 이 postmodern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불안하다. 다원주의적 현상을 신앙의 위협으로 느끼고 교회는 세상을 향해 벽을 쌓기 시작했고 (보수)기독교에서 즉각적으로 취한 입장은 postmodernism를 공격하고 폄하하는 것이였다.
하지만 정말 진리를 살아가고 있다는 그리스도인 이라면 이렇게 불안해 하며 postmodernism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김기대 목사(LA 평화의 교회)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신학과 교회가 결코 수세에 몰릴 이유가 없다"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탈중심, 탈논리, 탈이성을 추구하는 불안한 시대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동시에 전 시대를 껴안으려는 건강한 시대라고 볼 수 있다. 해석과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다시 부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시대"라고 이야기 한다. 과학이 세계의 흐름을 주도해오던 modernism의 역사속에 사실 교회와 하나님은 그 위치를 많이 상실해 왔다. 모든것에 논리적이며 과학적인 “한가지의” 설명과 해석만을 받아들여 오던 그 시대속에 교회는 점차 영향력이 없어진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postmodernism의 “전 시대를 껴안으려는” 속성은 다시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릴수 있는 기회를 가져온 것이라 할수 있다.
Postmodernism의 중요한 축은 바로 차이의 인정이고 평등이다. 이 곳에서는 강압적 권위주의와 폭력은 절대로 자리할수 없다. 이것은 Postmodernism이 교회로 하여금 예수의 가치인 “평화”를 회복할수 있도록 큰 가르침을 줄수 있는 부분이고 교회는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할 필요가 있다. 교회(기독교)는 지난 역사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 지난 역사속에 기독교는 진리를 지킨다는 명목하래 권력과 야합하여 힘의 통치를 추구하며 폭력적 행실을 보여왔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 윤리 및 가치들을 힘의 지배를 통해 타인들에게 강압적으로 요구해 왔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에도 여러 교회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예: 한기총의 ‘다빈치코드’ 반대 시위) 이렇게 동일성만 주장하고 ‘차이’를 부정하여 대립과 죽음 안타까운 역사가 무성하게 자라온게 기독교 역사의 큰 부분이였고 그것은 ‘진리’사수를 위해 예수의 평화와 사랑이라는 진정한 의미의 ‘진리’를 무너트려온 모순의 역사였다. 이제 교회는 서로의 ‘다름’을 긍정하면서 우리가 이전에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를, 그리고 더 나아가 새롭고 건강한 영성을 발견할수 있어야 할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것은 “인간의 속성은 일점으로 축소하기에 다양한 내면세계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한 개인 안에도 다양성이 존재하고 사람들의 관계속에선 더 많은 다양성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이 ‘다름’과 ‘차이’를 하나의 개념과 질서와 해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은 분명한 독선이며 오만이다. 차이를 긍정하는 것은 자신이 틀릴수도 있다고 하는 당연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임과 동시에 상대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약자들과 소수자들의 목소리에도 귀기울일수 있도록 해준다. 다양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다양한 대답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가지 답만을 제시하는건 오히려 왜곡의 소지가 많으며 위험한 접근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9-10)
Postmodernism의 이렇한 긍정적인 측면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더욱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로 살아가는데 도움을 줄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중요한건 이말의 뜻이 절대로 예수를 기초로하는 기독신앙이 ‘진리’가 아닐수도 있다고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 ‘진리’를 믿고 지키고 살아가며 전하는 그 방법론에 있어서 평화적이여야 하고 그 평화살기를 해낼수 있는 능력과 방법을 postmodernism의 가치속에서 찾아 볼수 있다는 이야기다. 서로의 다름과 다양성을 존중하고 그것을 힘으로가 아닌 평화적 대화와 삶으로 풀어나가고자 하는 그 가치는 예수의 가치이기도 하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된자라 하셨으며 의을 위하여 박해를 ‘하는’자가 아니라 박해를 ‘받은’사람이 복된자라 하셨다. 이 말은 서로를 존중하줄 알며 소수자들과 약자들의 편에서는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야기와 같은 뜻일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원수’ 또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우리가 경청해야 하는 타인의 목소리에는 ‘원수’도 당연히 포함된다. ‘타인’이라는 말은 절대로 나와 같은 뜻을 공유하는 친구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한 기본적인 깨달음이 우리안에 있다면 그 어떤 사람들도 소중히 대할수 있고 그 어떤 목소리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질수 있을것이다. 이젠 기독교가, 교회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더 평화적일 필요가 있고 ‘아름다운’ 삶을 세상에 보여줄 필요가 있다. ‘진리사수’의 목적으로 자행된 수많은 크고 작은 폭력과 힘의 지배의 고리를 잘라내고, 그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사랑과 평화의 삶이라고 하는 예수의 ‘아름다운’가치로 되돌아가야 갈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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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길, 진리, 생명
2009년 8월 31일 월요일
일본의 정권교체
일본.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54년만에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의미있는 일이라고 본다. 앞으로 일본과 아시아가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두고 볼 일이다.
한국처럼 신자유주의의 늪에 빠져 10년 안에 몰락한 뒤 보수정권을 다시 불러오는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의미있는 일이라고 본다. 앞으로 일본과 아시아가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두고 볼 일이다.
한국처럼 신자유주의의 늪에 빠져 10년 안에 몰락한 뒤 보수정권을 다시 불러오는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2009년 7월 26일 일요일
'보수', 욕망의 또 다른 이름
제목이 너무 볼온한가? 어쨌든.
'보수'란 무엇인가? 우선 위키백과 부터 찾아보자.
누군가는 정말 차고도 넘치고 넘쳐서 주체할수 없을 만큼 가지고 있는 이 현실 속엔 당연히 그와 반대인 사람들, 오늘 내일 먹을것 조차 없어 인간적 품위는 오래전에 손에서 놓아 버릴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도 존재 한다. (너무 당연한 이치라 말하기도 민망하다.) 이러한 현실속에 자기만 배부르기 위해 '보수주의자'라는 가면을 쓰고 (공공 의료 보험에 괴상한 정치적 언어만 쓰면서 반대하고, 전쟁 찬양하며, 자기의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했던 노동자를 쓰고 버리는 물건 취급하며) 다니는 사람들의 맨얼굴은 그저 욕망덩어리일 뿐이다.
'보수'란 무엇인가? 우선 위키백과 부터 찾아보자.
종교나 문화 및 민족의 기존 가치관 유지라... 뭔가 숭고하게 들린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보수'가 그만큼 숭고한가? 우리의 사회는 철저히 여러 계급으로 나뉘어진다. 계급이 나뉘는걸 탈피해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이렇게 계급이 나뉘어 사는 우리의 사회에서, 당연히 힘있는 상류계급의 이념과 사상이 더 실현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 상류계급은 본인들이 꼭대기에 올라 앉아 있는 그 현실을 '현상유지' 하고 싶어 하고, '보수주의'를 선택하게 된다. 자기만 배불르기 위한 현상유지. 이것이 오늘날의 '보수'다. 소중한 가치를 지켜내기 위한 보수라기 보다는, 자기의 위치와 부와 명예를 지키기 위한 보수. 누구 말대로 '이념'보수는 사라지고 모든 보수는 '생계형' 보수가 되어있다. 쉽게 말해, 남이야 어떻게 됐는 최대한 나만 잘먹고 잘살자고 하는 사상. 그것이 우리시대의 보수 이고, 난 이런 보수주의를 그냥 '욕망'이라고 줄여서 부른다."보수주의(保守主義, conservatism)는 종교나 문화 및 민족의 기존 가치관 유지를 주장하는 정치 이념이다.
누군가는 정말 차고도 넘치고 넘쳐서 주체할수 없을 만큼 가지고 있는 이 현실 속엔 당연히 그와 반대인 사람들, 오늘 내일 먹을것 조차 없어 인간적 품위는 오래전에 손에서 놓아 버릴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도 존재 한다. (너무 당연한 이치라 말하기도 민망하다.) 이러한 현실속에 자기만 배부르기 위해 '보수주의자'라는 가면을 쓰고 (공공 의료 보험에 괴상한 정치적 언어만 쓰면서 반대하고, 전쟁 찬양하며, 자기의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했던 노동자를 쓰고 버리는 물건 취급하며) 다니는 사람들의 맨얼굴은 그저 욕망덩어리일 뿐이다.
몇가지 더 하고 싶은 이야기 (CLICK HERE)
교회까지 (혹은 교회인척 하는 단체들이) 아주 철저히 이런 자기중심적 '보수주의'와 둘도 없는 베스트 프렌드로 결합되어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건 참으로 맥빠지는(역겨운) 일이다. 이렇한 모순이 있을까? 기독교의 핵심 메세지는 '사랑'이라고 많이들 이야기
한다. 옳은 이야기다. '사랑'에 대해 할말이 많았던 사도바울의 이야기 한마디가 머리속에 맴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이 시대의 보수가 살아가는 모습과 정반대의 모습이다. 이 시대의 교회는 '자기 이익과
힘만 지키려 하는 무례한 집단'의 대명사가 되어있다. 이런 모순이 다수의 교회들을 통해 대놓고 일어나는 현실 속에 소수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건 쉽지 만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세상에서나 교회안에서나 소수로 사는건 왠지 모르게 매력적인 일이다.
"초딩도 이해하는 예수의 경제학"

하지만 성인들은 (특히 교회 좀 다닌 다고 하는 사람들 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예수의 경제학.
(사실은 이해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라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하겠다.)
*이미지 출저: gyuhang.net (일러스트 김대중)
2009년 7월 25일 토요일
4학년 4반 윤영식
오늘 문득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셨던 이오순 선생님이 떠올랐다. 조금 쌩뚱맞은 이유에서 이기도 하다. 칼빈주의 신학과 애나뱁티스트의 신학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을 하다, 문득 어릴적 읽은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 10인" 이라는 책에서 칼빈에 대해 읽었던 것이 떠올랐고, 그 책을 당시 초등학교 4학년 아이였던 나에게 선물해 주신 이오순 선생님이 문득 떠올랐다. 어쨌든 중요한건 이 생각의 흐름이 이오순 선생님을 떠오르게 했고 그 때의 좋은 기억들이 떠올라 잠시 미소을 지었다는 것이다. 생각을 해보면 초중고를 다니면서 인격적 결함이 있는 선생님을 만나 본 기억이 없는듯 하다. 특히 조국에서의 보냈던 중학교 1학년 때 까지 만났던 선생님들은 모두 학생들을 "인격체"로 대해 주셨던 고마운 분들 이셨다. 대한민국에서 보편적으로 모두가 쉽게 할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그 선생님들 중 유난히도 이오순 선생님이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그는 카톨릭 신자였다. "개신교" 교회를 열심히 출석하며 주일학교를 드나들던 나에게 자연스레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고, 무언가를 강요하시기 보다는, 초등학교 4학년이였던 나의 생각에 대해 듣고 싶어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남아 교실을 청소를 해야하는 당번일 때도 함께 남아 청소하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아마 저 책을 선물 받은것도 그 청소 도중 이였던것 같은데 이것은 확실하진 않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떤 마음으로 도대체 아직 제 몸 하나 소중히 다루기 힘든 나이인 초딩4학년에게 저런 책을 선물해 주셨을지 좀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ㅋㅎㅎ) 초등학교 4학년이라 자세히 생각나지는 않고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도 많이 없지만, 그냥 따뜻한 그의 모습이 오늘 문득문득 떠올랐다. 만약에 지금 찾아뵐수 있다면 함께 교실에 앉아 사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신앙과 삶, 예수의 길 따르기 등등에 대해 함께 커피를 홀짝이며 이야기 할수 있을까? 지금은 그냥 꿈만 같은 이야기다. 내 기억으로 선생님이 40년대생이시라고 알고 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올해 정확히 65세 이실거다. 언제나 찾아뵐날이 올수 있을까? 건강하셔야 될텐데...
2009년 7월 20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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