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대학청년부 금요모임을 2주간 인도할 기회가 있었다.
무엇을 이야기할까 고민하던 중 postmodernism을 다뤄보자는 이야기들이 있어서 가이드로 사용하기 위해 써본 글이다. '평화'라는 그리스도의 가치와 굉장히 동떨어져있는 현대 교회를 보며, 다시금 '교회'와 '평화'가 연합할수 있는 길을 postmodernism에서 모색해 보고, postmodernism을 바라보는 건강한 기독교적 시각을 고민해 보았다.
탈근대주의(Postmodernism)와 교회, 그리고 평화
Postmodernism. 그 어떤 종교, 철학, 이념, 예술도 한가지 기준으로만 평가받지 않고, 우등과 열등이 명확히 나뉘지 않는 시대이다. 여기서 모두는 “제 기능이 따로 있다”라는 평등적 사상아래, 모든것이 계급적이 아닌 기능적으로 분류되고 각자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된다. 이 현상은 종교적 “다원주의”와 기본적인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수 있다. 한가지 기준으로 무엇인가를 평가하고 재단하던 우리의 modernism적 습성은 이러한 postmodernism이 우리의 일상에 침투함에 큰 거부감을 보이게 된다. 이로인해 하나님이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많은 신, 혹은 상품 중 하나가 되어버린 이 postmodern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불안하다. 다원주의적 현상을 신앙의 위협으로 느끼고 교회는 세상을 향해 벽을 쌓기 시작했고 (보수)기독교에서 즉각적으로 취한 입장은 postmodernism를 공격하고 폄하하는 것이였다.
하지만 정말 진리를 살아가고 있다는 그리스도인 이라면 이렇게 불안해 하며 postmodernism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김기대 목사(LA 평화의 교회)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신학과 교회가 결코 수세에 몰릴 이유가 없다"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탈중심, 탈논리, 탈이성을 추구하는 불안한 시대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동시에 전 시대를 껴안으려는 건강한 시대라고 볼 수 있다. 해석과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다시 부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시대"라고 이야기 한다. 과학이 세계의 흐름을 주도해오던 modernism의 역사속에 사실 교회와 하나님은 그 위치를 많이 상실해 왔다. 모든것에 논리적이며 과학적인 “한가지의” 설명과 해석만을 받아들여 오던 그 시대속에 교회는 점차 영향력이 없어진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postmodernism의 “전 시대를 껴안으려는” 속성은 다시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릴수 있는 기회를 가져온 것이라 할수 있다.
Postmodernism의 중요한 축은 바로 차이의 인정이고 평등이다. 이 곳에서는 강압적 권위주의와 폭력은 절대로 자리할수 없다. 이것은 Postmodernism이 교회로 하여금 예수의 가치인 “평화”를 회복할수 있도록 큰 가르침을 줄수 있는 부분이고 교회는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할 필요가 있다. 교회(기독교)는 지난 역사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 지난 역사속에 기독교는 진리를 지킨다는 명목하래 권력과 야합하여 힘의 통치를 추구하며 폭력적 행실을 보여왔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 윤리 및 가치들을 힘의 지배를 통해 타인들에게 강압적으로 요구해 왔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에도 여러 교회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예: 한기총의 ‘다빈치코드’ 반대 시위) 이렇게 동일성만 주장하고 ‘차이’를 부정하여 대립과 죽음 안타까운 역사가 무성하게 자라온게 기독교 역사의 큰 부분이였고 그것은 ‘진리’사수를 위해 예수의 평화와 사랑이라는 진정한 의미의 ‘진리’를 무너트려온 모순의 역사였다. 이제 교회는 서로의 ‘다름’을 긍정하면서 우리가 이전에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를, 그리고 더 나아가 새롭고 건강한 영성을 발견할수 있어야 할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것은 “인간의 속성은 일점으로 축소하기에 다양한 내면세계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한 개인 안에도 다양성이 존재하고 사람들의 관계속에선 더 많은 다양성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이 ‘다름’과 ‘차이’를 하나의 개념과 질서와 해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은 분명한 독선이며 오만이다. 차이를 긍정하는 것은 자신이 틀릴수도 있다고 하는 당연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임과 동시에 상대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약자들과 소수자들의 목소리에도 귀기울일수 있도록 해준다. 다양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다양한 대답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가지 답만을 제시하는건 오히려 왜곡의 소지가 많으며 위험한 접근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9-10)
Postmodernism의 이렇한 긍정적인 측면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더욱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로 살아가는데 도움을 줄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중요한건 이말의 뜻이 절대로 예수를 기초로하는 기독신앙이 ‘진리’가 아닐수도 있다고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 ‘진리’를 믿고 지키고 살아가며 전하는 그 방법론에 있어서 평화적이여야 하고 그 평화살기를 해낼수 있는 능력과 방법을 postmodernism의 가치속에서 찾아 볼수 있다는 이야기다. 서로의 다름과 다양성을 존중하고 그것을 힘으로가 아닌 평화적 대화와 삶으로 풀어나가고자 하는 그 가치는 예수의 가치이기도 하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된자라 하셨으며 의을 위하여 박해를 ‘하는’자가 아니라 박해를 ‘받은’사람이 복된자라 하셨다. 이 말은 서로를 존중하줄 알며 소수자들과 약자들의 편에서는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야기와 같은 뜻일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원수’ 또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우리가 경청해야 하는 타인의 목소리에는 ‘원수’도 당연히 포함된다. ‘타인’이라는 말은 절대로 나와 같은 뜻을 공유하는 친구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한 기본적인 깨달음이 우리안에 있다면 그 어떤 사람들도 소중히 대할수 있고 그 어떤 목소리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질수 있을것이다. 이젠 기독교가, 교회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더 평화적일 필요가 있고 ‘아름다운’ 삶을 세상에 보여줄 필요가 있다. ‘진리사수’의 목적으로 자행된 수많은 크고 작은 폭력과 힘의 지배의 고리를 잘라내고, 그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사랑과 평화의 삶이라고 하는 예수의 ‘아름다운’가치로 되돌아가야 갈 시점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