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기에 일종의 시대의 철학이라고 말할수도 있을것이다. 발터벤야민의
말로는 현대의 시대는 기술복제의 시대다. 모든것들이 기술로 인해 빠르게 복제되고 전달되며 그 복제가 또 복제가되어 퍼져나간다.
그 복제들은 더 이상 원본과의 일치와는 관계없이 서로서로 관계하며 움직인다. 그리고 그 관계들은 어떤 특정한 위계질서로 정리되지
않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미셸 푸코,
『파이프』, p. 72). 그것들은 어떠한 방향으로도 관계를 형성할수 있다. 여기에는 굉장히 많은 긍정적 층면들이 있다.
예를들면, 계급의 붕괴와 평등이 그것이겠다. 그 어떤 철학도, 이념도, 예술도, 음악도 한가지 기준으로만 평가받지 않고, 우등과
열등이 명확히 나뉘지 않는다. 여기서 모두는 “제 기능이 따로 있다”라는 평등적 이념아래, 모든것이 계급적이 아닌 기능적으로
분류되며 서로 각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이러다 보니 표현의 자유가 넓어지고, 무언가를 전하는 기능을 하는 media조차도 그 자체로 메세지가 되어 자기의 목소리를 내게된다. 함께 어우러져서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야하는 사명이 있는 인류에겐 한층 진보된 의식이라 하겠다.
하지만 또한 부정적인 측면도 엄연히 존재한다. 모든것이 복제되고 또 그것이 복제되는 동안 원본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벤야민은 이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음에도 원본이 없어지는 이 현상을 “아우라의 붕괴”로 표현하였다. 사진으로 찍어 놓은 고흐의
작품을 보는것과 실제 고흐의 작품을 보는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 실제 작품 앞에서는 말로 표현할수 없는 아름다움, 존재의 떨림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 작품을 사진으로만 봐야할때는 더 이상 그만큼의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원본이 사라진 세상, 본질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존재의 떨림, 그 아우라를 경험하기란 쉽지 않는일이다. 혹은 불가능한 일일수도 있을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수많은 정보와 복제 이미지의 홍수속에 본질의 이미지를 기억하지 못해 방황하게 된다. 그 현상속에 우리는 결국 "세계가 무엇인지, 인간은 무엇인지, 전체적 견해를 형성할 능력을 잃어" 버리게 된다. 진중권 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세계관의 공백"이라고 이야기 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과거처럼 역사의 최종목적(텔로스)을 설정하는 그런 세계관 철학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상황입니다. 과거와는 다른 방식과 형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형성시켜주는 새로운 지식의 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계관의 공백 中>
그 세계를 바라보는 "다른 방식과 형식"을 "예수"의 존재와 그의 삶, 그의 가르침에서 찾아볼수 있지 않은까. 여기서는 "다른" 방식이라고
표현 되었지만, 예수의 방식, "하나님 나라"의 모습, 그것이 결국 원본이다. 우리가 겪고있는 "세계관의 공백"을 덮어씌울 "하나님 나라"라는 그
이미지, 그것이 원본이며 진정한 현실이리라.
모든것이 제 목소리를 내고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정의를 위해 노력하지만 아직 그 평화는 당도하지 않았다. 모두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이상을 가지고 살지만 궁극적 이상의 원본이 사라진 이때에 모두가 어지럽기만 하다. 이런 카오스 속에 살고 있는 인류에게
예수는 진짜 현실, 즉 원본이 무엇인지 그림으로 그려주고 있다. 하나님 나라, 그 진짜 현실, 그 "원본"을 우리 마음속에,
그리고 우리의 의식속에 이미지화 시켜놓고 계신다.
그 원본이 어떠한 이미지를 띄고 있는지,
도대체 어떤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지,
그 그림을 그려보는 작업을 슬슬 시작해보려 한다...